음모론 vs. 합리적 의심

'진보논객'으로 불리는 교수나 좌파지식인들, 때로는 진보적인 법조인들의 글이 왜 불편한가에 대한 생각.

요즘 그들이 자주 언급하며 비판하는 지점을 키워드로 보면 '음모론' '집단지성' '대중 선동' 등이다.  완벽한 논리나 고급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없는 일반인들이 - 무결점의 정보와 배경지식을 가진 존재가 있기는 한지도 모르겠고 - 충분히 의혹이 생길만한 사건에 대해서 의심하는데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이를테면 '개그에 불과한 나꼼수의 음모론' 정도로 치부한다.

노무현, 한명숙, BBK 관련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무리한 수사와 담당 검사들의 이례적 승진. 이어지는 진보교육감에 대한 검찰의 기소.  이정도면 충분히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법한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사후후보매수죄의 구성요건요소, 대가성의 입증책임 등에 대해 논리와 법조문을 두고 논리를 펼치며 곽교육감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진영논리에 매몰된 멍청한 대중으로 폄하한다.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자들이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식 법논리를 처음 보나.  사건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도 동시에 '검찰은 정치를 그만두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 그런 진보논객은 없었다.  나름 진보적인 법조인들도 이게 그 조문에 해당이 되네 안되네.. 대중이 관심을 끊기 딱 좋은 얘기들로 지면을 채워갔다.  법조문 따위... 우리나라는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나라다.  그런 힘들을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검찰에 대한 비판이 먼저여야 했다.  특히 진중권은 곽노현 사건에서 칸트까지 인용하며 반대자들을 조롱했는데, 이거야말로 비겁한 먹물의 전형이다.  칸트를 몰라도 지금 이나라에서 검찰이 정권의 하수인노릇을 하고 있다는건 똑똑히 볼 수 있다.

서울시장 선거때의 선관위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드러난것 만으로도 수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고 디도스건 뭐건간에 선거를 가지고 집권당이 장난치려고 시도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나라가 뒤집어질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선 선거의 결과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진보논객들은 이 문제에 침묵하거나 중요한 논점을다 내팽개치고 논의를 디도스 공격이 몇시에 있었냐 따위의 부차적인 단계로 끌어내렸다.  합리적인 의심을 '괴담'으로 치부한 것도 그들이다.  그 논거라도 적절했으면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그랬을리 없다'가 주장의 주된 근거 아니었나.  내가 새누리당 관계자라면 이들 진보논객들이 이뻐서 선물이라도 주고 싶을것 같다.  물론 새누리당을 연결한 이런식의 접근은 진보논객들에 의해 '반MB가 전부인 진영논리'가 되어버린다.  본인들을 비판하는건 뭐든간에 진영논리나 파시즘이라며 원천봉쇄하니, 언젠가부터 이들은 틀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밑도끝도 없이 "진보의 생명은 도덕성" 이라는 명제를 강요하다가, 바로 그 명제의 생산자인 수구매체에 기고한다던가, 종편에까지 출연하면서도 궤변으로 정당화하는데.. 이쯤하면 정말 봐주기 힘들다.   


진보논객들의 논리가 일관성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학자 특유의 고리타분함 - 논객중에 학자가 아닌자들도 있지만 - 으로 봐 줄 수 있겠는데, 그조차도 결여됐다는게 내 생각이다.  진중권이 '선동된 대중(닭)'으로 비판하는 나꼼수 청취자와 2008년 촛불집회 참가자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개인적으로 양쪽 모두에 해당하기도 하고.  촛불시위는 유모차부대, 중고생들까지 참여한 집회였고 광우병과 소고기 협상의 디테일까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 진중권이 나꼼수팬을 조롱하는 이유가 거의 대부분 적용되는 유사한 사건이다.  하지만 진중권이 '파시즘' '팬덤' '선동된 우매한 대중'을 논할때 본인이 참가해서 '선동'까지 담당했던 촛불집회 얘기는 쏙 빼놓는다.  내가 참가하고 동의했으면 바람직한 대중의 움직임이고, 내 의견과 다르거나 내가 생각한 방향이 아니면 음모론과 파시즘에 선동된 대중이 되는건가.

좀더 거슬러 올라가 4.19혁명이나 6월항쟁 같은 대규모 민주화운동의 경우, 아무도 당시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선거제도의 의의나 절차에 대해 이론적으로 숙지하고 있었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부정선거가 있었다니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단순한 논리였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대의大義를 내세우는 엘리트에 '선동'된 사람들이고 이게 진보논객들이 비웃는 '집단지성'이다.  그래서, 이들 민주화운동의 의미가 퇴색되는가.


음모론으로 비판받던 나꼼수발發 의혹들이 최근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는 '증거'와 무관하게 (그것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도), 합리적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는 진보논객들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진중권을 언급했지만, '유사 진중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글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뭔진 잘 모르겠지만 공부 많이 하신분들이 균형을 잡아주신다고 하니 맞는 말씀인것 같아요'식의,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팬덤'도 존재하는것 같다.  역시나 스스로의 팬덤문화을 비판할 일은 없을테고 그럴수록 더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어디선가 '홍세화가 진보신당 지지자 한명 데려오면, 진중권 이택광이 두명씩 내보낸다'는 농담을 본 기억이 있다.  트위터 퐐로워도 상당하고 여전히 언론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진보논객들이 공개적으로 진보신당을 지지했던걸 감안하면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지지율은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들이 지금같은 방식으로 대중을 취급해서는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지하는 정당도 아닌 민주당의 패배원인이 나꼼수냐 아니냐 분석하는 오지랖보다는, 기대이하의 진보정당 지지율에 대한 원인분석이 먼저가 아닐까.  결과를 두고 진보신당의 문제점과 대표인 홍세화의 무능을 탓한다면 누구보다 발끈할 사람들이, 소속정당도 아닌 민주당의 패배에 대해 정당내부의 구태와 대표 한명숙의 무능, 나꼼수의 문제에 대해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by setarcos | 2012/04/26 00:48 | 트랙백 | 덧글(0)

김구라 김용민

김용민이 8년전 발언으로 집중포화를 받더니 김구라가 10년전 발언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의 친분이 직접적인 원인임은 따로 증명이 필요할것 같지 않다. 이런것까지 찾아들추는 끝을 모르는 치졸함은 별론으로 하고 (주어 없음), 다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에서 방정한 품행으로 고상하게 살고들 있길래 이리도 엄격한가. 우라니라에서 웬만한 중범죄 공소시효도 10년을 넘기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국은 상당히 거친 사회다. 애들은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이 당당하게 다수의 지지를 받고, 우리가 종종 당연하게 여기는 조직에서의 폭력적 상하관계나 강압적 술자리 등 외부인들은 직접 보기전엔 믿기조차 어려운 '문화'는 부지기수다. 범죄와 조폭소재 영화의 비중이 이만큼 높은 나라가 또 있을까. 폭력/폭언에 이렇게 너그러운 사회에서 10년전 '막말'에 보이는 민감함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여러가지로 맘에 안드는 시절이다.

by setarcos | 2012/04/19 05:45 | 트랙백 | 덧글(0)

결국은 계급

성별, 세대, 지역, 국가, 인종.. 사회적 갈등이라 불리는 것들이 굉장히 다양해 보여도 결국 하나, 경제적 계급갈등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은 계급갈등의 하위개념이며, 계급갈등을 가리기 위한 훼이크인 경우가 많다. 대학 신입생들 상대의 학회세미나에서나 나올법한 얘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선배들을 피해 도망다닐때가 더 많아 당시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모르는게 사실). 그런데 이게 나이가 먹고 세상을 관찰할수록 생생해진다. 제대로 읽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하려는 말이 이건가 싶다.

같은 한국인이며 서울에서 태어나 살고있는 동년배 재벌 3세 갑男 보다, 소비할 수 있는 자원한도가 비슷한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20대 흑인 A女에게 느끼는 동질감이 훨씬 더 강하다.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에게 느끼는 동질감이 점점 강해진다고 해야겠다. 뒤늦게 계급의식이 발동하는건가 싶다. 

FTA건 뭐건간에 '국익'의 관점에서 설명하는건 넌센스다. 그래, 이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니 한국에 이익인지 미국에 이익인지가 아니라, 양국의 계층에 따른 이해관계가 논의와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언론과 학계가 이걸 몰라서 안하는건 아닐 터, 당장 나부터 정책효과를 연구할때 경제적 변수의 중요성을 강조할 생각이다.

by setarcos | 2012/03/29 09:06 | 트랙백 | 덧글(0)

질투

무언가를 비판할때 가장 김빠지는 반응이 ‘부러워서 그런다’일 것이다. 논리나 증거와는 거리가 먼 이 커멘트는 날때부터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물론, 고생해서 뭔가를 성취한 사람들이 더 신경질적으로 내뱉는것 같다. 좋은 직업을 갖고 높은 지위에 오른것 자체를 질투하는게 아니라 권한/권리 밖의 부정/부당함에 대한 비판인데 이걸 정말 모르는건지 아는데 방어본능이 작동하는건지.

재벌총수일가 비자금을 담당하는 임원, 수사권한을 개인의 영달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검사를 비판하는건, 그들이 얼마나 어렵게 승진하고 힘들게 사법시험을 통과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걸 연결지어서 비행非行을 변호하고, 정당한 비판을 덜 가지고 덜 노력한 사람들의 ‘질투’의 레벨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유치하다. 그렇다고 마음의 영역인 질투여부를 보여줄 수도 없으니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 하기야 애초에 그런 약점을 노린 공격이겠지만.

by setarcos | 2012/03/13 10:30 | 트랙백 | 덧글(0)

법조인

"좋아하는 후배이자 존경하는 젊은 법학자인 김정환 박사에게도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얘기로 것이지만 법학자들은 어떤 (사회적)변화를 얘기할 , 어떤 조항과 원칙을 불변의 기준으로 삼아 범주 안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탐문한다(예를 들면 어떤 법의 원칙 때문에 상식과는 달리 여기까지밖에 안된다라는)반면에 정치학자들은 기준을 바꾸면 된다고 (예를 들면 법을 만들면 되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법을 하는 사람들(법학자나 사시출신)과의 대화나 논의에서 조우하는 답답함은 대단히 똑똑하고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을 가진 그들의 체계적 논리가 항상 어떤 보이지 않는 틀거리 안에서만 작동한다는데서 온다. 틀거리 안에 포획되어 논의가 진행되면 상대방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무식한 자가 되기 쉽다. 그러면 마치 신학의 논리를 아는 사람과 대적하는 초보신자와 같은 신세가 되고만다. 그러나 틀을 뛰어 넘는 대화가 진행되면 서로 다른 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대화가 무의미하게 허공에서 맴돌거나 의미없이 단절되곤 한다

물론 몇몇 아주 개방적인 종사자들은 특유의 지적 호기심을 발동하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아주 드물다...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지간에 그런 격차가 매우 크다. 통섭의 교육이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법을 해석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교육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페이스북 친구가 된 인제대 홍재우 교수의 담벼락 글이다. 
전공자이지만 그렇다고 법 전문가는 아닌 애매한 위치, 거기다 정말 가까운 친구들이 법조계에 많이 있다는 현실 때문에 법조인에 대한 비판에 조심스러워지는것이 사실이다. 그런 입장에서도 이 글은 충분히 적정 수위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제도나 판결이 사회 이슈가 되고 거기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될 때마다 현행법이라는 틀, 이 안에서 공부하고 생각해온 법조인들이 비전문가들이 법논리나 내부사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비판한다며 불만을 갖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느끼는 답답함에 대해 잘 풀어쓴 글이라고 본다.

몇몇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을 제외하고, 살아온 환경 기타 사회경제적 지위등이 개인의 생각을 방해하는건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을때가 많은것 같다. 뛰어남과는 거리가 먼 나도 당연히 사회현상을 접할때 이런 한계를 많이 느낀다. 극복은 고사하고 노력을 해야 간신히 '내가 이런 한계가 있구나'정도를 파악이나 하는데 그친다.  나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유복한 가정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자의 한계를 발견하면서 부끄러워질 때도 종종 있다.  이전 포스팅에서 우리나라 진보세력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쏟아낸 적이 있지만, 그들의 지적이 맞다고 느낄 때는 대부분 나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이다.

그런데 법조인에게 느끼는 답답함은 단순한 '한계의 존재'에서 한발 나아가 오만의 영역에 진입한다. 꼭 출세에 집착하거나 수구적인 생각을 가진 법조인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법조인들도 이부분에서는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상적인 의미의 오만함보다는 수위가 낮을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위의 "법논리 때문에 상식과는 달리 여기까지밖에 안된다" 는 말이 가진 정도의 오만함이다. 점잖게 표현했지만 '사람들이 뭘 몰라서 하는소리다'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일상생활과 직접적 상관이 없는 문제,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따르는 연구방법론 같은거라면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통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관장하는 법률이나 당사자의 인생을 좌우하는 재판과 판결을 그런것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그들만의 책임이라기보단 사회적으로 그들에게 부여한 권위에 근거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법과대학, 사법시험등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상징들의 힘이다.  대부분의 대학 인문계 대입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법학과, 그중에서도 사법시험을 패스한 사람들, '고시공부'라는 말 자체가 주는 무시무시함, 그래서 공부와 논리로는 세계 어디다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집단이라는 이미지, (특히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권위를 가진 법, 이런 상징들이 법조인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일 뿐이라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경원敬遠(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하고 자연히 본인들도 착각하기 쉽고. 

무리한 표적수사와 법원의 판결을 '외계인의 논리' 라며 비판하는 정치검찰의 모습, 특히 작년 오세훈 나경원으로 이뤄지는 콤비플레이가 돋보였던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의 화려한 삽질, 화제가 되고 있다는 영화 '부러진 화살' 등의 현상이 법조인에게 부여된 비정상적 권위를 낮추는 역할을 할거라 본다. 이명박이 국민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시켜주고 있는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하는가 싶으면서도 그림자에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은것 같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by setarcos | 2012/01/22 03:1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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